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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세종대왕에 관한 조선 역사 이야기

by photoguide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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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은 없다!

 

조선시대에 만일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그대로 왕위에 올라서 오늘날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어떻게 또 역사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이 바로 세종대왕에 의해 발명되고 보급되어서 지금 스마트 디지털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알파벳을 쓰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지난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광화문광장-세종대왕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PhotoGuide.com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태종에게는 아들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양녕대군, 둘째 아들이 효령대군, 셋째 아들이 바로 세종이라 불리는 충녕대군입니다. 그런데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사람은 바로 세자로 일찍 책봉된 양녕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 피바람을 겪으면서 왕위를 얻은 태종은 장자세습의 원칙을 세워서 대통을 이으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리되지 않고 또다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이 되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양녕대군은 정말 또라이였는가?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뒤를 이어서 아주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타고난 절대 자리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라이로 판정됩니다. 양녕대군의 기행과 또라이짓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썰이 있습니다. 충녕대군이 왕이 되었기에 양녕의 한심한 짓거리가 후에 더욱더 부각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세자의 자리를 빼앗길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양녕대군은 1418년에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됩니다. 황희 등 원로대신들 중 일부는 세자 폐위를 반대했지만 오히려 이들은 태종에 의해 유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왕세자의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양녕대군이 태종과 성격도 맞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양녕은 호방하고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로 글공부에 관심은 없고 사냥이나 노는데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종은 이러한 양녕에 태도에 화가 나면 대신 세자의 환관에게 매를 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기대는 큰데 실제로 큰 아들이 하는 꼴을 보니 걱정도 되고 화가 나는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특히 양녕은 글공부에는 아주 관심이 없었고 학문에 관한 싫증은 도를 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떼를 지어 궁궐에 건달패나 기생들을 양녕대군이 들인다는 소문이 현실로 발각되면서 태종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게 됩니다. 궁궐 담을 넘어 무뢰배들과 비파를 타는가 하면 기생들도 불러들여 궁궐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잡희(雜戱)를 즐기니 태종은 격노합니다. 앞으로 왕이 될 놈이 노는 꼴을 보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환장하는 노릇이겠습니다.

 

태종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과 무예 그리고 내공을 키워서 왕자의 난까지 겪으면서 왕이 되었는데 큰 자식이라는 놈은 맨날 술만 처마시고 계집들을 불러 놀고 자빠졌으니 양녕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양녕은 시간이 지나면서 도가 더 지나쳐서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도 합니다. 또한 중추부사 곽정의 첩 어리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도적질 하여 궁궐에 들이는 일까지 벌입니다. 이러한 또라이 같은 비행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마침내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하여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납니다. 

 

충녕대군, 대권을 엿보다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은 또라이 형을 보면서 기회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충 형이 노는 꼴을 보니 아버지 눈 밖에 날 것은 자명하고 둘째 형은 대권에 관심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왕위가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이미 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알기로는 양녕은 왕위를 양보하였고 효령은 왕위에 관심이 없어서 충녕이 왕위를 얻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충녕은 아주 치밀하게 차근차근 그리고 아주 내실 있게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신하들에게도 인심을 얻게 됩니다. 충녕은 왕위를 준비하는 아주 정밀한 대권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던 것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세종대왕은 대군 시절에  대권에 욕심도 없이 그저 착하게 공부만 열심히 한 모범생으로 보통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충녕대군은 이미 자신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을 미리 알고 야심 차게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양녕의 기행과 방탕함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태종의 분노가 끓어오르면서 슬슬 충녕대군의 주가는 오르게 됩니다. 태종은 세자들을 비교하면서 충녕대군을 칭찬하고 이에 신하들도 덩달아 그를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뭐 이쯤 되면 왕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벌써 알아서 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대세에는 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인심이 쏠리자 충녕대군은 과감하게도 형인 양녕대군의 기행에 대해 대놓고 비판합니다. 어찌 보면 앞으로 왕이 될 형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 정도면 대충 대세는 충녕에게 온 것입니다. 하루는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꾸짖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 하는 짓인가?"라며 일갈합니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것인가?

형 미친 것 아냐?

대충 충녕이 양녕에 대해 이제는 까놓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양녕대군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또 자랑을 늘어놓자 충녕대군은 형에게 마음을 좀 갈고닦으라고 충고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새 옷을 장만했다고 자랑하는 놈도 한참 모자란 놈이지만, 충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양녕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인물로 전락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하들도 점점 충녕대군의 말이 옳다며 모두 세자를 비판하는 등 깎아 내리기 시작합니다. 대충 양녕의 입장에서는 세자로서 위신이 망가진 것입니다. 한편 충녕대군은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를 모시고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이때 연회 도중 남재가 충녕대군에게 갑자기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 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남재가 충녕을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떠 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당시에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냥 수긍하는 분위기로 됩니다. 현직 이미 세자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왕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역모로써 고변하는 등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았지만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간단하게 보고하고 마무리짓습니다. 한편 태종은 남재가 반역이나 역심이 있다고 야단을 치기보다는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었다고 하니 이것만 봐도 벌써 태종의 속마음이 벌써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충녕대군, 세자에 오르다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야 할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 난다면 어차피 다음 왕은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왕위 계승 명분 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 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든 셋째 아들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차남인 효령대군 또한 왕위를 잇겠다는 욕심이 없어 자연스럽게 왕위는 충녕에게 가게 됩니다.

 

한 번은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했다고 합니다. 명나라 사신이 와서 충녕을 이렇게 치켜 세운 것을 보면 혹시 미리 사전에 작업을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떻게 멀리 떨어진 명나라 사신이 충녕이 어떻고 양녕이 어떻고 그 자질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명나라 사신이 그만큼 충녕을 치켜세울 때는 그만한 사전 작업이 있었으리라 봅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도 없고 정보도 별로 없는 조선 시대에 난데없이 명나라 사신이 와서 충녕이 왕처럼 총명하다고 한 것을 보니 뇌물을 먹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할 바 없지만 좌우지간 충녕에 대한 인심은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고 하니 이미 대세는 충녕대군에게 쏠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세자로 먼저 책봉된 양녕대군은 왜 또라이로 전락했을까?

그는 원래부터 또라이였을까?

아니면 양녕대군이 또라이로 취급받도록 혹시 누명을 쓴 것은 아닐까?

 

그날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하여 우리들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어쩌면 아버지인 태종이나 신하들이 충녕대군만 감싸고도는 것에 엄청 삐져서 미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보면 양녕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충녕대군이 왕이 오르던 때는 조선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알고 보면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에 이 또한 쉽게 일이 전개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만 가지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습니다. 알고 보면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5번째 왕자로 태어나서 왕위 계승에 불리해지자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으로 등극했으니까 말입니다.  

 

효령대군, 왕위에 마음을 비우다

그렇다면 효령대군은 어째서 태종의 마음에 들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태종의 둘째인 효령대군은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조금 웃깁니다. 효령대군이 술을 못 마셨기 때문이라는 후문이 있습니다.

 

태종은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 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라"면서 은근히 효령대군이 군주의 자질이 없음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이미 효령대군은 불가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왕위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효령대군은 이미 눈치를 모두 채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도 없는데 괜한 미움을 살 짓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내 혼자 편안한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작에 왕위에 마음을 비운 것은 충녕대군이나 양녕대군이 아니라 바로 효령대군이라 볼 수 있습니다.

 

후문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폐위될 것으로 알려지자 효령대군이 글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양녕이 빡쳐서 효령에게 한 마디 했다고 합니다. 어리석도다 네가 충녕이 제왕의 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은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양녕이 비록 또라이급으로 여겨지지만 그도 이미 알 것은 알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세종대왕-동상
세종대왕 ⓒPhotoGuide.com

 

충녕대군, 왕이 되다

태종 18년(1418)이 되면서 효령대군이 맡았던 세자를 폐합니다. 그리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때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는 말도 나오지만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서 태종은 점잖게 뜻을 거두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새로 책봉합니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양녕대군은 계속 또라이 짓을 하며 세종이 곤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형이 세자에서 물러났지만 죽일수도 없고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양녕은 이후에도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녕대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왕이 되려다가 못되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원래가 또라이인데 더욱 더 충동적으로 또라이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편 세자의 자리를 떠난 양녕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동생인 충녕은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렸지만, 양녕은 서울을 벗어나 관악산 연주대 등지를 떠돌면서 풍류생활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는 69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녕이 동생인 세종보다 오히려 12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양녕대군은 모든 것을 훌훌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서 더 오래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좋은지, 살다 보면 모릅니다.

그때 왕이 되는 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풍류객으로 살다 사는 것이 좋았는지 그것은 양녕대군만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있었기에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이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로 또 그렇게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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