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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 정도전, 조선의 건국과정 다시보기

by photoguide 201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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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 정도전, 조선의 건국 과정 다시보기

 

  이방원과 정도전이라는 두 인물의 갈등과 대립의 양상을 잘 살펴보면 조선의 건국 과정이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KBS 역사 사극 정도전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정도전과 이방원의 역할이 흥미진진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원 그는 누구인가? 역사는 당대에 의해 평가되기 보다는 후대에 의해 공정하게 평가된다고 볼 때,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 있어 이방원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재평가 할 것이 많다.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조선의 건국 과정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다는 이방원, 그리나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가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세력과 다른 왕자들을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 이방원의 면모를 따져보면 그는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역사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큰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그러한 과정에 있어 정적들을 무차별하게 숙청한 부정적인 면도 돋보인다. 이방원은 덕이 아닌 무력을 기반으로, 그리고 리더쉽보다는 헤드쉽으로 조직을 장악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다 죽일 수 있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이방원에 대해 혹자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물, 또는 오로지 권력만 추구하는 인물 등으로 부정적으로도 보나, 어떤 이들은 목표를 성취하려는 긍정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딱 어떻다고 단평하기 어렵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취했던 행동을 본다면 이방원이 어떤 스타일이었는지 쉽게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방원은 막히면 뚫는다는 <뚫어 뻥 마인드> 사고방식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방해되는 인물이라면 아무리 알고 지내던 사이라도 인정사정없이 죽여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방원에 의해 죽은 이들을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이방원을 한번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역전을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행동하라.

 

  첫째, 위기에서 망설임이 없이 그는 정몽주를 과감하게 암살하였다. 고려시대 말 정몽주는 수시중의 자리로 매우 존경 받는 인물이며 이성계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누구도 사실상 정몽주를 죽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6살의 젊은 이방원은 독단으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암살한다. 이 당시 정몽주가 실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왕실도 정몽주 편이었고 이성계 세력이 열세에 접했을 때라 시기적으로 어려웠을텐데 이방원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몽주를 암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혹자들은 이성계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고려사 실록 등을 보면 이성계도 정몽주가 암살당한 것에 대노하였고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보듯 이방원을 멀리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정몽주를 죽여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고 조선을 창업하는데 있어 자신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방해가 된다면, 바로 그 장애물을 제거하라.

 

  둘째, 방해가 된다면 기습공격을 하여서라도 죽여라. 왜, 이방원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며 가장 핵심 일급참모인 정도전을 죽여야 했나? 결론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 받지 못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정도전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의 디자이너로 알려진 정도전은 외교와 행정, 법제에도 뛰어났고 시와 문장도 대단한 수재였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삼봉집 등을 남기기도 했으며 고려사37권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천재적인 그의 지략도 결국은 누구를 다음 왕위에 올리는가 하는 문제와 연루되어 정도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조선을 창업하기 이전의 상황과 조선을 창업한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정도전이 간과했다면 이는 큰 실책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아들인 이방원의 생각은 아주 달랐습니다. 정도전이 생각하는 조선은 신권이 왕권보다 강한 나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기 보다는 덕망 있는 군주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차라리 어린 왕자를 교화하여 차기 임금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정도전에게 있어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신하들에 의해 보필을 받는 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보더라도 이방원보다는 가장 어린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타당했다고 정도전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전의 선택은 결국 왕자의 난으로 연결됩니다.

 

  일단은 여기까지도 정도전의 정국 구상은 아주 훌륭하게 이루어지는 듯 했다. 정도전의 생각대로 의안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는데 성공했고 이어서 조선경국전을 편찬하고 조선왕조의 법과 제도의 틀을 만들며 과전법도 추진하고 역성혁명의 새출발은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은 서서히 내부의 반발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이방원의 입장에서 볼 때 정도전은 이제 조선을 창업한 공신으로 여기기보다는 자신이 꿈꾸는 왕권을 침탈하는 방해자로만 남게 됩니다. 이러던 차에 정도전은 1398년(태조7) 음력 8월 26일 밤에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그는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무참하게 그 자리에서 살해됩니다.  결국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새나라가 세워지고 고작 7년 밖에 살지 못했으니 이 또한 허망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그가 고안했던 정국 디자인은 조선 600년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역설적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

 

  셋째, 자신을 도운 사람이도 목적을 위해서면 죽인다. 그는 왕권 확립을 위해 1차 왕자의 난때 자신을 도왔던 외가 식구들도 죽여 버립니다. 알고 보면 이방원은 정말 무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방원은 조선의 제도를 하나하나 정비해 나감과 동시에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왕권을 우습게 보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피의 숙청을 단행합니다.

 

  이방원 본인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끔 도왔던 원경왕후의 민씨 집안도 결국은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방원이 왕이 되게끔 도왔다는 이유로 권세를 자랑했지만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처남들도 모두 숙청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민씨 집안이 이방원을 도와서 어찌 세력을  잡아 볼까 했지만, 세력도 행사하기 전에 이방원이 미리 외척들을 모조리 참살해 버려 결과로 따지자면 민씨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났으니 거참 아니 도와준 것만 못한 셈이다.

 

  즉 한마디로 이방원은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행동하면서 방해가 되는 세력은 모조리 제거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방원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만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입니다. 이방원이 추구하는 세상으로 가는 데는 많은 이들이 죽었고 아마도 지금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들도 훨씬 더 있으리라 봅니다.

 

 

 

 

 

이 세상은 밥짓는 사람 따로 있고, 그 밥을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설거지 하는 사람 따로 있다.

 

  사족을 달아보자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상하며 스케치한 인물은 정도전이었으나 막상 나중에 그 그림을 완성한 인물은 이방원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일까요? 조선의 이러한 건국 혼란이 수습되면서 세종대에 이르러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도 이때 만들어졌다니 이 또한 흥미로운 역사의 일면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조선의 건국에서부터 붕괴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보면, 밥을 짓는 이가 따로 있고 그 밥을 짓게끔 하는 땔감을 가져오는 이 따로 있고, 다 차려진 밥을 먹는 이가 따로 있고, 그 설거지를 따로 하는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사족을 달자면,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무참하게 민씨(閔氏)들이 배신을 당하고 살해되었는데, 조선이 망해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민씨(閔氏)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역사의 우연이라면 우연입니다.

 

 

참고로 위의  배경 사진은 창덕궁에서 촬영한 것이며,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건립된 궁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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