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포토스토리

박인환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얼굴

by photoguide 2018.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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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짧은 생애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긴 울림을 주고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때로는 잠깐 이 세상에 왔지만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지난번 우연히 아주 오래된 시집을 계속 보다가 오늘은 그 가운데 박인환 시인의 삶을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태어나 1956년 생을 마치었습니다.

 

고작 서른이라는 나이로 짧은 삶을 끝냈지만, 그가 남긴 시는 이제 우리에게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박인환 시인의 묘비에도 그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바로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인데, 유명한 그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

 

명동백작, 댄디보이라고 불릴 만큼 핸썸하고 지적인 용모를 지닌 박인환 시인은 당대 문인중 최고 멋장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술'이 늘 함께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 만들어진 우연한 시 한편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시인데,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는 한 줄 한 줄 음미해보면 볼 수록 긴 여운이 남는 시입니다.

 

이 시가 탄생하게된 스토리가 있는데 1952년 어느 날 박인환 시인이 휘가로 다방에서 문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는데 나애심이라는 가수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박인환 시인이 시를 쓰고, 그가 쓴 즉흥시를 옆에서 극작가였던 친구 이진섭이 작곡을 하자 그 자리에서 나애심 가수가 부르게 됩니다.

 

작사, 작곡, 노래가 그 자리에 바로 나오게 됩니다.

바로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노래로 한 것입니다.

 

허름한 술집에서 문인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시와 노래를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함께 했던 것이 정말 대단하기도 하지만,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그때 그렇게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낭만적이기도 합니다.

 

시인, 문인, 화가 등 예술을 사랑하지만 배 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에 허무하게 살다간 천재적 시인 박인환이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좋은 시를 썼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술을 너무나 사랑했던 시인,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에도 '조니워커'라는 양주를 마지막으로 입에 대고 떠난 시인입니다.

 

박인환 시인의 작품은 '세월이 가면' 외에도 '목마와 숙녀'가 있는데 이 시도 나중에 곡으로 많이 알려집니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곡으로 인생과 사랑을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하는듯 하는데, 이 노래도 한번 들으면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시집에 실린 박인환의 시 몇 편을 함께 소개하여 드립니다.

검은강, 이국항구,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얼굴'이라는 시입니다.

 

 

검은강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부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히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이국항구

 

에베렛트 이국의 항구
 그 날 봄비가 내릴 때
 돈나 캼벨 잘 있거라.

바람에 펄럭이는 너의 잿빛머리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내 머리는 화끈거린다.

몸부림 쳐도 소용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서로 알면서도
 젊음의 눈동자는 막지 못하는 것.

처량한 기적
 덱키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이제 나는 육지와 작별을 한다.

눈물과 신화(神話)의 바다 태평양
 주검처럼 어두운 노도(怒濤)를 헤치며
 남해호(南海號)의 우렁찬 엔진은 울린다.

사랑이여 불행한 날이여
 이 넓은 바다에서
 돈나 캄벨 - 불러도 대답은 없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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