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 2차 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비극

by photoguide 2021. 1. 14.

역사는 늘 찬란하지 않습니다.

특히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슬픈 역사가 자리 잡습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패망을 하고 겪은 비극에 대해 혹자들은 자업자득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비극을 아무런 죄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혹독하게 겪는다는 것 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정치인들과 미치광이들이 전쟁이 끝나고 사라졌지만 일반 보통 국민들은 그 또라이들이 저지른 엄청난 일들에 휘말려 인생을 망치게 된다는 것 입니다.

 

2차대전 전후, 독일계란 이유로 수백년간 살던 고향에서 약 1,200만명에서 1,650만명이 국외로 추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음에도 가해자 민족이란 이유로 독일은 항의도 못하였답니다.


전후에 독일인은 수많은 것을 잃는 가운데 독일사회는 붕괴되고 국민은 처절하게 보복당합니다. 독일은 2차 대전에 패망하고 영토와 국민, 기술 등을 모두 빼앗기는 일을 겪어도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죄명하에 아무런 말을 하지도 못한다.

■ 독일의 영토는 폴란드, 오스트리아, 소련등에 40%를 빼앗기고 60%만 남았다.  

 

2천만명의 독일인이 동독으로 강제이주되고 또는 동유럽 국가로까지 쫒겨간다. 그곳 추방지역에 기다리는 집단수용소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추방시기 동안에 3백만명의 독일인들이 잊을수없는 모욕속에서 살해되었고 2백만명의 소녀와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전쟁포로 신세였던 3백만명의 군인중 1백만명은 고의적 기아로 굶어죽었다.

 

 독일 포로 수백만명이 서방 연합국에 끌려가서 강제노역을 당하는가 하면 시민이 거리에서 징집되서 강제노역에 끌려가기도 한다.

 

 독일 전체에 고의적인 기아가 왔다. 전후 1945년부터 1950년까지 기아로 인해 6백5십만명의 독일인이 기아로 사망한다.


 페이퍼클립  PAPERCLIP 작전 아래  독일지식인들은 일부 미국으로 끌려가고 기술과 특허를 넘겨주게 된다.


 독일이 보유했던 금괴는 모두 강탈되었고 박물관의 작품이나 개인 소유의 작품까지도 미군에 의해 강탈되었다.


 독일 영내의 모든 산업시설은 해체되고 파괴되었다.

어리석은 전쟁을 일으킨 정지지도자로 인하여 그 고통은 그대로 독일인이 짊어지고 가야했던 역사의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를 우리가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이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국민들은 결국 엄청난 후과를 받는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지도자가 한명이라면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국민은 수백만 아니 수천만명이 될 수 있다. 한반도에서도 지난 1950년 전쟁을 일으킨 미치광이로 인해 수백만명의 무고한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고 이산가족이 되는 술픔을 겪지 않았는가? 나찌 히틀러나 공산당 김일성과 같은 미치광이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민간인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는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중 하나, ‘독일인들의 비참한 이주’와 국경 재조정


독일인이 근거지를 잃고 동부에서 밀려나온 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으며, 두 단계 모두 다 결과가 비참했다. 첫째 단계는 붉은군대를 피해 혼비백산해서 도망친 것이었고, 둘째 단계는 여러 세대에 거려, 어떤 곳에서는 1,000년 동안 독일인이 살아온 정주지역에서 주민을 의도적으로 쫓아낸 것이었다. 1945년 1월의 피난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 강제수용소를 빼고는 - 견줄 데가 거의 없는 고통을 겪은 사건이었다. 바그라티온 공세로 난민이 되어 발트 해 연안국가들과 폴란드의 독일인 정주지역을 떠나온 피난민으로 이미 인구가 늘어난 동프로이센의 주민들은 붉은군대가 독일 본토에서 처음 마주치는 독일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떼를 지어 고향을 떠나 살을 에는 겨울날씨 속에 발트 해 바닷가로 걸어갔다. 1월에 약 45만 명이 필라우 시의 항구에서 소개되었다. 90만 명은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40마일을 걸어서 단치히로 가거나 얼어붙은 프리셰스 하프 석호를 건너 대기하고 있던 배에 이르렀다, 그 배들 가운데 한 척이 8,000명을 태운 채로 러시아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서 단일 해상 재앙으로는 익사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난 무덤이 되었다. 독일 국방군은 피난민 구조를 엄호하려고 거의 미친 듯이 용함하게 계속 싸웠다. 히틀러 정부 외무차관의 아들이자 독일 연방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리햐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는 프리셰스 하프 전투에서 1급 철십자 훈장을 탔다.

1945년 처음 몇 달 사이에 동부에서 피난을 하다가 악천후에 몸이 상하거나 학대를 받아 죽은 독일인이 100만 명에 이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1945년 겨울에 - 슐레지엔, 체코 주데텐란트, 포레른과 그 밖의 지역에서 살며 모두 합쳐 약 1,400만 명을 헤아리는 - 동유럽 독일인 가운데 나머지는 대부분 체계적으로 소집되어 서쪽(878)으로, 대개는 영국의 독일 점령지역으로 이송되었다. 도착한 피이송민은 빈털터리였고 종종 재산을 모두 빼앗긴 막바지 단계에 있었다. 이 끔찍한 여정을 다 마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폴란드에서, 그 밖의 동유럽지역에서 쫓겨나는 도중에 죽은 사람이 각각 25만 명, 125만 명, 60만 명이었다고 추산된다. 엘베 강 동쪽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독일인 인구가 1946년까지 1,700만 명에서 2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자주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이 잔혹하게 수행된 독일인 추방은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승전국들이 서로 간에 합의했던 결정에서 보면 불법이 아니었다. 포츠담 회담 의정서 제13조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 남아 있는 독일인을 독일로 이전해야만 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던 것이다. 더욱이 포츠담에서 서유럽 연합국들은 독일 국경의 재조정에 동의해서 슐레지엔 및 포메른과 함께 동프로이센 절반을 폴란드에 주었(고 다른 절반은 소련으로 갔)다. 폴란드가 강요를 받아 자국 동부지방을 러시아에 넘겨주어서 득실이 상쇄된 이 국경 재조정으로 폴란드가 서쪽으로 100마일 옮겨져서 지도가 바뀌는 결과가 빚어졌고, 인구의 측면에서 전후의 폴란드는 새로 얻은 서쪽 국경지대에서 독일인 주민을 내쫓는 대가를 치르고 완전히 폴란드인만의 나라가 되었다.(879)

(《2차세계대전사The Second World War》, 존 키건 지음, 류한수 옮김, 청어람미디어. 878 & 879쪽. 제33장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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