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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역사] 장희빈, 그녀는 과연 희대의 악녀였나?

by photoguide 2021. 2. 17.

역사를 보면 미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미인들은 권력의 총애를 받으면서 왕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몰락의 길을 가기도 한다. 특히 왕의 여자가 된 미인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야기가 분분하다. 이쁜 여자는 지금도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의 총애를 얻지만, 옛날에도 미인들은 권력과 부에 따른 운명을 따라갔다. 

 

어느날 갑자기 왕의 총애를 얻어 하루아침에 엄청난 실세로 등장한 여인이 있는가 하면, 그 왕이 변심해서 그 여인을 버려서 참혹하게 인생을 끝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미인은 왕이 죽자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야만 하는 숙명을 따르기도 했다.

 

조선의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단연 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된다. 즉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과연 어떤 여인이었고, 우리가 드라마나 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 같이 그렇게 악녀였을까?

 

사진으로 보는 역사,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서오릉, 대빈묘, 장희빈의 무덤

 

 

禧嬪 張氏/玉山府大嬪

장희빈, 궁녀에서 왕비까지


희빈 장씨,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라는 여인의 운명은 과연 어땠을까?

얼마전 서오릉에 가보니 장희빈의 묘가 있었다.

그녀에 대해 궁금증은 불현듯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장희빈의 오빠 이름이 장희재니까 그냥 장희빈이 이름인줄 알지만, 이것은 잘못 아는 것이며 조선 내명부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인 것이다. 그래서 장희빈이다, 이름이 희빈이 아니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무수리 신분에서 숙종의 사랑을 받아 후궁이 되었고 왕비까지 되었다. 물론 결말은 참혹한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신분상승을 한 것 아닌가?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여성이라니 무엇인가 특출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숙종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아니 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궁녀에게 그렇게 마음을 주고 빈 자리와 왕비 자리까지 주었겠냐 말이다. 요새 말로 따진다면 어느 재벌회사에서 말단 여성직원에게 그룹회장이 확 반하여 청혼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장희빈이 숙종보다 나이도 많았다는데 오죽 그녀의 미모가 빼어났으면 왕이 반했겠는가? 공식적인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장희빈의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니 그 정도면 지금 연예인급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 되었고, 그녀를 기리는 사당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러나 그녀의 묘소인 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또한 현재 대빈묘(大嬪墓)는 왕을 낳은 후궁치고는 매우 초라하게 했으니 죽어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의 재위 기간이 워낙 짧아 장희빈 묘를 어떻게 잘할 수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나 이야기를 통해서는 장희빈이 악독하여  또 다른 궁녀로 숙종의 사랑을 받였던 숙빈 최씨를 잔혹하게 매질했다거나 사약을 거부하며 저항하다 비참하게 죽었다고 하나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니, 우리가 아는게 어디까지 진실인지 모르겠다. 드라마를 보면 장희빈이 악녀로 묘사가 되는데 나라의 쇠퇴나 멸망에 기여한 인물이 아닌데도 어떻게 악녀로 남게되었는지도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악녀로 전해질까?

장희빈에 대한 썰을 한번 풀어볼까 한다.

 

장희빈은 한국 TV 사극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되는 인물인데. 그녀의 미모의 관점이 아니라 그 당시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고보면 장희빈은 조선 숙종 재위 시절에 정치적 당쟁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사실 알고보면 신분이 미천해서 그 흔한 빽도 없었다. 이 와중에 노론은 장희빈을 적대적으로 대하며 악녀로 몰았는데, 이것은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할 때 반대했던 노론의 거장안 송시열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

 

왕이 사랑한 여인,

어쩌다 왕비가 되다!

 

‘희빈(禧嬪)’ 장씨의 본명은 ‘옥정(玉貞)’이라  한다.

장옥정이 그녀의 진짜 이름이다.

 

어쩌다 그녀는 ‘조선판 신데렐라’가 되었는데 사실 궁녀가 왕비가 된적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녀로 인해 그 이후에는 금지되어서 그녀만이 궁녀에서 왕비가 된 것이니 가히 특급 대우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1674년 14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이 된 숙종은 20대로 접어들며 두 살 연상의 대비전 나인 장옥정에게 홀랑 빠졌다. 사실 20대면 얼마나 발기충만한 나이인가? 왕도 남자인데 미인을 보았으니 돌아버린 것이다. 장옥정과 정신없는 사랑에 빠진 숙종은 어머니 현열대비의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옥정을 잊지 못하고 돌아올때까지 마음을 다 주었던 것 같다.

 

장옥정에게 후궁 첩지를 내린 실록의 기사를 보면 여기서도 그녀가 이뻤다고 대 놓고 써놨다. 아니 얼마나 이뻤으면 실록에 그런것 까지 기록했을까? 여인의 외모를 실록에 기록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처음이며 이후에 없었을터인데 숙종이 빠질정도로 미모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숙종은 정신이 없이 사랑에 눈이 멀었고, 숙종의 총애를 단팥빵의 앙꼬와 같이 듬뿍 받은 옥정은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친 사랑은 파국가는게 인생사이다. 이것은 과거나 현대나 미래나 인간이기에 똑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후궁 장옥정은 1688년 10월 왕자를 출산했는데 28살의 숙종은 아들을 본 기분이 너무 좋았다. 대박이 난거다. 한마디로 왕의 후사까지 이었으니 장옥정은 이제 조선의 서열 2위로 우뚝 선 것이다.  사랑하는 옥정에 아들은 본 숙종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여인과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아들을 본 다음해에 숙종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중대발표를 했다.  뭐 아들을 봤으니 내가 해주고 싶은 것 다해주고 싶다는 심정이었을까?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폭탄선언을 숙종은 해버렸다. 원자는 상속권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지칭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는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고 발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건 그 당시 엄청난 일이었다.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중전도 있는데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사실 앞에서는 말을 똑바로 못해도 뒤에서는 왕이 미친것 아니냐는 말도 했을 것이다.

 

신하들은 중전의 나이가 한창인데 뭐 그리 급하냐, 혹시 적장자(본부인의 맏아들)가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러면서 왕의 결정이 한심하다는듯 몰아부쳤고 숙종을 한마디로 또라이처럼 생각했다. 하기야 요새로 따져보면 어느 그룹의 회장이 본부인이 있는데 첩을 들여서 아들을 낳아 그 그룹의 계승을 시키겠다고 한 것이니 회사가 뒤집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신하들도 돌아버리기 시작했다. 어디 근본도 없는 여인이 들어와서 종묘사직을 거덜내냐는 불만과 함께 왕의 어리석음에 한탄을 한다. 그렇지만 어디 숙종이 신하들의 말을 듣겠는가? 왕은 신하들의 말은 무시한채 자신의 생각대로 장희빈의 아들인 갓난아기를 원자로 정하고, 어머니 장옥정을 희빈(정1품)에 봉한다.

 

그런데 이게 여기서 끝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멍청하게 생각했던 신하들의 숙청에 들어간다. 그렇다! 숙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결정한 것을 반대했던 신하들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감히 나 왕의 결정을 느그들이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래 맛 좀 봐라 하면서 쏘가리 매운탕을 강제로 맛보게 한 것이다. 신하들은 멘붕이었다. 

 

신하들을 물갈이하고 끝까지 반대한 원로대신은 유배 보낸 뒤에 죽여버렸다.

숙종은 참 대단한 것인지 멍청함의 끝판인지 자신에게 반대하는 놈들은 다 죽인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무서븐 놈이 왕이었다.

연상의 여인에게 빠져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제 그 빈자리는 새로운 인물들로 맞이하였다.

즉 ‘환국(換局)’이었다.

 

 

대빈묘

 

 

숙종의 필살기

내말을 안들으면, 다 죽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러한 환국은 숙종의 빅피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숙종이 자신의 본심을 어찌하기 위한 땅고르기로 이제 새로운 신하들 앞에서 느닷없이 중전의 자질과 투기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숙종은 장희빈이 궁에 돌아와 후궁이 되었을 때 인현왕후가 돌아가신 부왕과 대비를 들먹이면서 헐뜯었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중전이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현열대비)를 만났다면서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궁에 두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부터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거짓으로 꾸며 임금을 놀라게 하는가. 두 분이 숙원은 아들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럼 원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숙종실록’ 1689년 4월 21일)

숙종은 민가에서도 며느리가 거짓말로 시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왕가라면 어떻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이것은 다 그의 고단수 질문이었다.

 

즉 답은 정해졌다! 너는 내가 새로운 신하로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인데 누가 왕의 말에 반기를 들겠는가?
왕의 이러한 토로에 신하들은 진땀이 흘렀을게다.

 

알고보면 ‘지금 임금이 중전을 쫓아내려고 저러는 건가? 왕이 쳐 돌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과연 그 누가 왕에게 진실된 말을 하겠는가? 

 

숙종은 만면에 회심의 미소를 띄었을 것이다.

쯧쯧! 내가 임명한 것들이 내 뜻을 거스른다면 어찌되는지 모르냐!

 

한편으로 중전 폐출은 안 된다고 읍소하기도 한 신하들도 있었고 만백성이 우러르는 왕비는 어머니기에 내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숙종은 흘려들었다. 그리고 더욱 더 강하게 지금 왕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야심찬 뜻을 관철시키고자만 했다.

 

숙종은 대단한 놈이다.

자신의 뜻대로 쉽게 안되니 필살기를 동원하여 좋은 말로 안 된다면 다 죽이기 전법을 쓰겠다는 심사였다. 이때 운이 없게도 지난번에 조정에서 쫓겨난 자들이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숙종의 입장에서는 나를 우습게 보는 상소문을 올린 놈들 다 나와 하면서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도 가했다.

 

여기서 하나!

아니 숙종은 정치를 한다는게 신하들을 족치는게 전부였나 한다.

바른 말 하지도 못하게 공갈과 협박, 그리고 죽이기 전법까지 쓰는 가혹한 군주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숙종에게 재수없게 걸린 상소문 올린 이들은 압슬과 낙형은 물론이고 말대꾸 하는 입을 몽둥이로 까기도 하며 아주 모진 고문을 가했다. 좀 새디스트인가? 신하들의 비명소리와 죽음에 만족하는 숙종이라면 그 당시 백성의 입장에서는 참 안된 일이다. 그때는 뭐 촛불을 들고 나올 수도 없었고 광화문 사거리에 집합도 못했을테니, 이러한 광폭(넓게 미친)정치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후유증으로 유배를 가다 죽기도 하고, 한마디로 숙종에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때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숙종은 신하들에게 중전 폐출에 반대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공갈도 친다. 한마디로 내가 까라면 까라는 것인지 더 이상 신하들이 왈가불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689년 5월 인현왕후는 결국 폐비가 된다.

 

숙종의 야심찬 왕비쫒아내기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숙종은 사랑하는 장옥정을 왕비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바로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니. 조선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일이 시작된 것이다. 궁녀 출신으로 미모 하나만으로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우리가 모르는 비장의 남자홀리기 전법을 구사하는 장희빈은 왕비가 되는 최대의 행복을 세세만년 누릴 것 같았지만 이것이 사실 알고보면 장희빈으로서는 몰락으로 가는 또 다른 코스였을지도 모른다.

 

 

서오릉 대빈묘 안내문

 

 

숙종의 새로운 여인, 무수리 최의 등장

장희빈의 몰락, 경종의 죽음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만들고 나니 조금 심심했나보다. 이상하게 또 숙종은 둘레둘레 궁을 해매이다가 또 다른 무수리급 궁녀를 발견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그렇게 미모가 뛰어난 장희빈을 왕비로 앉히고 나니 또 다른 여인이 눈에 들어왔나 보다. 


숙종은 1693년 ‘미녀 왕비’를 제쳐두고 궁에서 일하는 최씨 여인과 또 염문을 퍼트리기 시작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정식 궁녀가 아니라 무수리라는 사실이다. 무수리는 알고보면 궁녀보다도 하찮은 계급으로 궁에서 노가다를 뛰는 여성 일꾼인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숙종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인보다는 궁녀와 무수리를 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숙종의 독특한 취향중 하나였는지 모르겠지만 주로 궁녀와 무수리에 눈길을 줬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적인 취향과 관련해서 흥미롭기도 하다.

 

숙종은 장희빈이 왕비가 된 이후 별로 재미가 없었나보다. 그리고 이때쯤 되니 장희빈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 사실 그리 전 같이 땡기지도 않고 애정도 식어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숙종은 이제 심심하니 또 다른 여인을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도 남자인데, 어찌 눈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한편 이러한 독특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와중에 민심이 변하기 시작했다.

 

임금은 말과 행동은 아무리 쎄게해도 여기저기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중전을 내쫒은 것에 대해 서서히 불만과 불평이 커져가면서 민심도 급격히 하락했다.

김만중의 한글소설 ‘사씨남정기’가 뜬 것도 이때였다. 

사씨남정기가 졸지에 베스트셀러로 다들 돌려보면서 말도 많아졌다.

알고보니 왕이 바보다!

 

이러한 가운데 숙종은 1694년 다시 또 한판 뒤집게 들어간다. 인현왕후를 쫓아내는데 동참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그녀를 지키려다 화를 당한 자들을 조정에 불러 앉혔다. 이게 바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숙종은 악화된 민심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리고자 마치 자신의 본심이 그게 아니었다는 편지도 인현왕후에게 보낸다.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숙종실록’ 1694년 4월 12일) 

 

크. 이렇게 인현왕후에 편지를 보내 마음을 또 훔치니 이 또한 숙종의 본심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과연 숙종, 그가 진정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이제 숙종은 하루빨리 인현왕후를 제 자리로 복귀시키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키고자 했다. 졸지에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또 희빈으로 강등을 받은 그녀도 돌아버렸다고 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희빈은 별당에 처소 한켠에 신당을 차려놓고 굿에 몰두하기도 하고 인형에 바늘을 꽂고 초상에 화살을 쏘는 엄청난 짓을 벌였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인현왕후는 종기로 고생하고 걷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희빈은 과연 굿의 효험을 본 것인가?

 

1701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희빈의 운명은 엇갈렸다. 자신이 메인으로 등장할 줄 알았는데 무수리 최씨가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 무수리 최는 숙종에 다 일러바친다. 장희빈이 저주를 해서 인현왕후가 갔다는 것이라 무수리 최씨는 숙종에게 고변을 했다. 이때 장희빈은 그게 아니고 세자(경종)를 위해 치성을 드렸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버린 숙종은 넌 사약이나 받아라였다.

 

이 대목에 짚고 넘어가자면, 

정말로 장희빈이 인현황후를 저주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들을 낳아주고 한때는 이불속에서 속삭임도 같이한 여인을 죽이겠다는 사약을 건넨 것을 보면 숙종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첩의 본분을 망각하고 왕비에게 방자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이러한 죄목을 나열했다.

결국 장희빈의 꿈은 일장춘몽이고 사약을 먹고 죽는 것으로 역사는 기록된다.

 

숙종은 당쟁을 놓고 정치적 책임을 교묘하게 주변에 돌리는 수법으로 왕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이렇다 할 정치적 지지 세력도 없었던 장희빈은 알고보면 당쟁이라는 엄청난 파도가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여인의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느날 갑자기 떠 오른 미천한 계급의 왕비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를 놓고 당쟁은 이리저리 떠 밀리고 왕은 한심하게 눈치나 보면서 책임을 벗어나기 급급했던 것 같다.

 

숙종이 죽고 경종의 즉위와 소론의 득세가 시작됐다.

그러나 1724년(경종 4) 8월 경종은 돌연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가 병약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독살설도 있다. 경종은 당시 왕세제궁에서 보내온 게장으로 수라를 들고 나서 생감을 먹었는데, 그날 밤부터 갑자기 증상이 나빠져 5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이후 게장에 든 독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인지 민간에서 게장을 먹고 생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전해져온다. 그러나 경종이 독살되었는지 아닌지를 사료로 증명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아들 경종은 왜 그리 빨리 사망하였을까? 역사에서는 병약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의문이다. 이후에 후궁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잽싸게 왕위에 오르면서 장희빈은 그냥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는데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녀의 운명은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여인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어딘지 모르게 유사하다. 


경종이 황망하게 죽은 이후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묘인 대빈묘는 그냥 그렇게 방치되었는데, 오늘날 서오릉에 가면 작은 그녀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장희빈은 숙종과 진짜 사랑을 못해본 것 일 수 있다.

당쟁의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고 죽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장희빈묘에 가서 참배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여성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대빈묘에 절을 하거나 춤을 추면 장희빈이 남자친구를 얻는데 도움을 준다는 썰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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